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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면 현내리 도원정사(桃源精舍)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현내리 두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도원정사(桃源精舍)는 경주이씨 기계 입향조(入鄕祖)인 조선중기 유학자 도원(桃源) 이말동(李末仝,1443~1518) 성균진사(成均進士)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928년에 후손들이 세운 누각(樓閣)이다. 도원(桃源)이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줄인 말이고,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수양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도원정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누각 형태의 다락집으로 건물의 모양은 사각형이며, 두 팔로 안아도 남음이 있는 소나무 기둥들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건물 중앙에는 확 트인 대청마루가 있고 마루 양편으로 2개의 방을 들여 놓았다. 


    좌측방은 삼외재〔三畏齋, 삼외란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나오는 말로 천명(天命), 대인(大人), 성인지언(聖人之言) 등 세 가지를 두려워함을 의미〕라 쓴 현판이 걸려있고. 우측방은 산택헌(山澤軒, 산택이란 산과 시내 즉 자연을 뜻함)이라 쓴 현판이 붙어있다. 


    도원정사 우측 마당에는 안락와(安樂窩, 안락은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를 말함)라고 부르는 규모가 약간 작은 별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2개의 방이 딸려 있다. 


    도원정사의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드넓게 펼쳐진 기계평야(杞溪平野)가 바라다 보인다. 그리고 멀리 어래산(魚來山, 572m)의 능선들이 보이고 우측으로 봉좌산(鳳坐山, 626m)의 능선들이 이어지면서 마치 한 마리의 봉황(鳳凰)이 앉아 비상을 꿈꾸고 있는 듯 신비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원 이말동 진사는 원래 경주부(慶州府) 부남(府南) 중리(中里)에서 출생하였으나, 수의부위〔修義副尉, 조선시대 훈련원(訓練院)의 군사일지(軍司日誌)기록을 담당하던 무관 벼슬〕를 지낸 부친 퇴재(退齋) 이윤흥(李允興)을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말동 진사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면서 경사(經史)를 두루 통달하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나 관직(官職)에는 뜻이 없고 오직 독서(讀書)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학행(學行)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양친(兩親)의 권유에 못 이겨 37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1480년(성종 11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말동 진사의 유고 <도원선생문집>에 따르면 이 때 함께 합격한 이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등이었다. 특히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는 김종직 문하에서 함께 동문동학(同門同學)하였고 동년계(同年契)를 결성하여 도의(道義)로서 평생을 사귀었다. 김종직 문하생이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과도 깊이 교유한 것으로 전한다.


    도원 이말동 진사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조선 유학사에 있어 사림(士林)의 종조(宗祖)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수많은 시를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정몽주에게서부터 내려오는 도학(道學)의 계승자였으며, 김굉필을 비롯하여 김일손, 정여창, 남효온, 남곤 등 많은 사림파(士林派) 제자를 육성하였다.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시초가 되는 인물로 나중에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훈구파와 갈등을 빚으면서 몇 차례 사화를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김종직 선생은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함께 고려 말 유학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名分)을 중요시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리려고 하였다. 또한 〈소학 小學〉과 <사서 四書>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김종직과 김시습의 도학사상은  이말동 진사의 학문 세계와 삶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도원 이말동 진사는 소과(小科)에 합격한 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다가 1494년에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이 성종(成宗, 1469~1494)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연산군이 난정(亂政)의 기미를 보이자 1496년(연산군 2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경주부 부남(지금의 경주시 충효동)으로 낙향한 부친을 따라 두 형과 함께 낙향하였다. 


    이후 이말동 진사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뜻을 세우고 은거지(隱居地)를 찾던 중 경주 북방에 산세가 좋고 물이 맑기로 유명한 경주부(慶州府) 기계현(杞溪縣) 현내(縣內, 지금의 포항시 기계면 현내리)로 입향(入鄕)하였다. 한때 기계면 현내리는 이말동 진사의 후손들이 전체 인구의 70%를 넘은 적이 있었을 정도로 큰 집성촌을 이루었다. 



    도원 이말동 진사의 유고(遺稿) <도원선생문집>에 기계 은거 중에 읊은 시가 전한다. 


    月留千古色(월유천고색) 저 밝은 달은 천년의 옛 빛이 어리고

    巖老百年藤(암노백년등) 바위는 늙은 등 넝쿨에 엉켜 있네.

    洞裏幽閑足(동이유한족) 한가하고 그윽한 골짜기가 마음에 드니 

    無心艶武陵(무심염무릉) 무심코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하노라. 



    도원정사 대청마루에 작자미상(作者未詳)의 ‘도원정(桃源亭)’이라는 제목의 한시(漢詩)가 걸려있다.

        

    桃源亭 題詠詩   ‘도원정’을 읊음

    (도원정 제영시)

    寂寞桃源與世違  적막한 도원은 세상과 잘 어울릴 수 없으니 

    (적막도원여세위)

    由來多少問人稀  하고 많은 사연을 물어 오는 사람조차 없구나. 

    (유래다소문인희)

    靑雲夢斷饒興適  청운의 꿈은 사라졌으나 여흥을 즐기기는 좋으니 

    (청운몽단여흥적)

    白髮愁緣孰是非  백발처럼 많은 근심, 시비를 가려 무엇 할까. 

    (백발수연숙시비)

    樂水遊魚能遠逝  물이 좋아 노니는 고기는 능히 멀리 갈 수 있고 

    (요수유어능원거)

    投林倦鳥自高飛  숲이 좋아 날아드는 새는 높이 날 수 있다네. 

    (투림권조자고비)

    甘心遯跡躬耕野  마음에 달가워 스스로 족적을 감추고 밭을 가니 

    (감심축적궁경야)

    垂死無成一布衣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한 한 선비의 삶이로구나. 

    (수사무성일포의)  


    * 포의(布衣) : 베로 지은 옷, 즉 벼슬이 없는 선비를 말함


    도원 이말동 진사는 조선 중기 경주지방에서 함께 활약했던 유학자 송재(松齋) 손소(孫昭, 1433~1484), 불권헌(不倦軒) 황정(黃玎, 1426~1497)과 함께 조선 중기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1924년에 그의 후손 이영우(李英雨), 이종현(李鍾炫) 등이 간행한 유고 <도원선생문집>이 전한다. 


    이말동 진사의 유문(遺文)은 시만 남아 있으며,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개 영물(詠物), 한거(閑居), 영회(詠懷)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인 동시에 피세(避世), 은둔(隱遁)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그의 성품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도원선생문집>에는 만시(輓詩) 5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만점필재김선생(輓焰畢齋金先生)」, 「만김대유굉필(輓金大猷宏弼)」 등은 그의 사우관계(師友關係)를 보여주고 있다. 부록으로 수록된 「사마방목(司馬榜目)」은 1480년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의 합격자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저자와 함께 사림학파의 유학자(儒學者) 김굉필(金宏弼), 송흠(宋欽), 성희안(成希顔) 등의 이름이 들어 있다.